혼자 대만에 가다 타이난 편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될
홀로 대만 여행기
타이난 편
이전 타이페이 편.
이번 편의 테마 곡은 황소윤의 Forever dumb. 타이난에서 들었는데 가사 그대로 'Wanna stay forever dumb 더 바라는 건 없'었다. 이 상황을 위한 곡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그래서 그런지 이 노래만 들으면 그 때의 햇빛, 온도, 습도, 냄새가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타이난은 남부 지방의 내륙 도시다. 한국으로 따지자면 대구 정도인데, 도시의 지리적 위치나 인구 순위, 도시의 영향력 등이 비슷하다고 한다. 보통 갸오슝에 간 사람들이 하루 일정으로 들리는 곳이라고 하는데 나는 목적지가 처음부터 타이난이었다. 수도인 타이베이는 외관이 깔끔하고 신식이라면 여기는 좀 더 오래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옛 양식을 지킨 낮은 건물들이 가득해 대만 특유의 빈티지한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타이베이보다 타이난에 있을 때가 마음이 편했다.
타이난은 타이페이보다 더 따뜻했다. 아무리 한국보다 위도가 낮다지만 그래도 1월, 한겨울인데 싶어서 긴 소매와 긴 바지만 챙겼는데 막상 여행을 가보니 반 소매를 입어도 쾌적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중에서도 최대한 얇은 옷을 골라 입었다
시간도 많겠다, 날씨도 좋겠다, 이번에도 대중교통을 안 타고 열심히 걸어다녔다.
첫째 날
해가 중천인데 달이 떠 있었다. 원리를 지구과학 시간에 배웠는데 기억이 안 나네.
구글맵으로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찾았다. 번역기와 구글맵 없을 때는 어떻게 여행을 다녔을까.
적감루. 대만이 네덜란드과 싸울 때 요새였다고 한다.
혼자 있으면 밥을 잘 챙기지 않는다. 이 날은 다른 날보다 입맛이 없어 아침, 점심을 거르고 다녔다. 적감루 근처는 시장이다. 시장을 지나다니며 음식 냄새를 맡자 그제서야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시장에서 혼자인 내가 적당히 먹을 수 있는 메뉴가 탄탄면이었다. 내가 가게 앞을 기웃기웃 거리자 주인이 나와서 말을 걸었다. 영 못 알아듣는 눈치이자 휴대폰을 가져왔다. '번역기를 사용하려고 하나?' 싶었는데 한국어 메뉴판이 나왔다. 상상도 못한 정체였다. 아니 한마디도 안 했는데 한국인인 걸 어떻게 알았지. 갑자기 등장한 한국어 메뉴판이 왜 이렇게 웃기던지. 덕분에 즐거운 식사를 했다.
바다의 신을 모시는 신전이다. 타이페이에서는 거의 못 봤는데 타이난은 거리 곳곳에 이런 신전이 있었다. 신성한 공간에서 무지에서 나온 무례를 범할까봐 들어가지는 않았다.
대만문학관.
공자묘. 묘지보다는 공원에 가까웠다. 산책하는 사람들, 연인과 데이트하는 사람들, 뛰어노는 아이들로 가득했다. 옛날에는 유학 교육을 담당했던 장소인 것 같다.
푸중제. 여기도 쇼핑 거리였던 걸로 기억한다.
밤에는 화원 야시장에 구경을 갔다. 평소에도 향신료가 가득한 이국적인 음식 먹기를 좋아한다. 가리는 식재료도 없다. 그래서 대만에서 강한 향신료 때문에 음식을 못 먹어서 괴롭지는 않았다. 그냥 맛이 없었을 뿐... 평소 성격대로 야시장에서도 이것 저것 시도를 했는데 제일 기억에 남는 음식은 꼬치였다. 여러 종류의 육류에 쯔란을 뿌려 판매했는데, 나는 그중에 타조, 양, 소고기 이렇게 시켰다. 진짜 타조인지는 모르겠다. 일단 ostrich라고 적혀 있었다. 타조 고기는 생소해서 시켜봤는데 소고기나 양고기와는 식감이 또 달랐다. 부드러운데 기름지지는 않아서 제일 맛있게 먹었다. 처음보는 과일도 먹었다. 플라스틱 컵에 초록색 과일과 딸기가 담겨져 있었다. 딸기는 별 맛이 없었다. 초록색 과일은 씹으면 뽀드득거렸다. 아삭과 꼬드득의 사이였다. 과일 이름이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확신이 안 간다. 닭발은 우리나라 족발과 비슷한 맛과 향이었다. 쫄깃했다. 야시장의 규모가 생각보다 컸다. 음식뿐만 아니라 옷이나 악세서리, 소품도 팔았다.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매우 활기찬 분위기였다.
둘째 날
이 날의 첫 일정은 타이난 기차역이었다. 이전에 끊은 타오위안 행 MRT(일반 열차) 티켓을 환불받기 위해서였다. 전날 알아보니까 THSR(고속 열차)도 타오위안에서 정차하는 노선이 있었고 심지어 역에서 바로 공항철도를 탈 수 있었다. 더 편하고 확실하게 공항에 갈 수 있었다. 문제는 타이난 THSR 역으로 가는 방법이었다. 타이난 역과 타이난 THSR 역의 위치는 전혀 달랐다. THSR 역은 도심과 떨어진, 엄청 외진 곳에 있었다. 접근성이 좋지 않아서 고민하던 와중 타이난 THSR 역까지 가는 무료 서틀을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문제도 해결됐겠다, THRS를 타기로 결정했다. 타이난 역에 기차표를 환불받으러 갔다. 그 김에 THSR 표도 끊으려고 했는데 일반 역에서 THSR 기차표를 구매할 수가 없었다. THRS 표는 그 역에 가서 끊어야 했다. 내가 너무 우리나라처럼 생각했다.
역에서 나오니까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복통에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근처에 드럭스토어에 들어가서 약을 찾았다. 정신이 없어서 번역기를 쓸 생각도 못하고 영어를 했더니 직원 분이 당황했다. 그래도 어떻게 알아 들으시고는 약 있는 곳으로 안내해줬다. 약 먹으니까 괜찮아졌다.
택시를 타고 선농제로 이동했다.
선농제. 사람 없이 텅 빈 거리에 가게 문도 다 닫겨있길래 지는 거리인 줄 알았다. 알고보니 저녁이 주 활동 시간대였다. 그저 너무 일찍 가서 상점 문이 다 닫겨 있는 거였다.
다리가 이끄는대로 걷다보니 어느새 타이난 시장에 도착했다. 대로 변에는 사람을 보기 힘들었는데 안쪽으로 들어가자 사람이 가득했다.
현지인들이 줄 서서 먹는 모습에 이끌려 들어간 식당. 우연히 현지 맛집을 발굴하나 싶어서 두근거렸지만 음식이 나오자마자 그 기대감이 꺼졌다. 무슨 맛인지 모르겠는 새우밥과 기름에 볶아 느끼한 청경채가 전부였다. 타이페이 메인 스테이션의 푸드 코트 때는 푸드 코트라서 간단한 음식이 나온 줄 알았다. 그 이후에 다시 한 번 이런 식사를 마주하니 이게 보편적인 음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기름에 볶은 청경채가 흔한 반찬이라는 말이야? 아니 청경채를 데쳐서 참기름 넣고 다진 마늘 넣고 깨만 뿌려도 훨씬 맛있을 것 같은데 왜 하필 기름에 볶는걸까? 한국인은 충격을 받았다. 실패 위험을 줄이려면 역시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식당에 가야 한다.
내리쬐는 햇살, 야자수 잎, 살랑이며 기분 좋게 부는 바람, 귀에 들리는 황소윤의 Forever dumb까지. 완벽했다.
블루 프린트 문화 창의 거리. 도시 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일본 식민 지배 시기에 건설된 일본인 기숙사를 개조한 곳이다. 소품샵, 카페 등이 들어와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 맡겨놓은 짐을 찾았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
돌아가는 첫 단계는 타이난 THSR 역으로 가기였다. 역으로 가기 위해 무료 셔틀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 번호는 H31. 서는 정류장이 정해져 있고 배차 간격이 길어서 꼼꼼히 확인해봐야 한다.
셔틀 버스를 30분 정도 타고 도착했다.
역사 내에서 파는 도시락 냄새가 끝내줬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구매한 도시락은 델리만쥬였다. 짜파게티 큰 컵과도 동의어다. 맛이 향을 따라오지 못했다. 조금 먹고 디저트를 사 먹었는데 달다리했다.
고속철도 내부는 넓고 깔끔했다.
타오위안 역에 도착해서 공항 철도를 탔다. 공항으로 가는 마지막 단계였다. 역과 역이 이어져 있고 안내 표시가 잘되어 있어서 어렵지 않게 찾았다. 공항 철도 발권기에는 한국어 설정도 있었다. 외국에서, 한국어 표시는 또 처음이라 신기했다.
이 이후는 기억이 안 난다. 현실 복귀가 너무 괴로운 나머지 내가 삭제해버린듯하다.
다녀오고 얼마 후에 국내에 코로나 감염자가 나와서 해외 여행이 줄줄이 취소됐다. 시기를 잘 탔다.
외부적인 이유로 해외 여행을 가지 못해서일까. 여행의 여운이 평소보다 길다. 아직도 포에버 덤을 들으면 대만을 느긋하게 둘러보던 그 날로 돌아가는 듯하다. 그. 당시에는 해방감을, 직후에는 현실을 살아갈 힘을, 현재는 위로를 주는 여행이다. 혼자 다녀온 여행이라 제멋대로지만 나의 니즈를 온전히 충족시키는 날이었다. 현실을 살면 그러기가 힘든데 그럴 때 대만의 기억들이 위로가 된다. 다만 내가 조금 더 의욕적이었다면, 혹은 타이페이 일정이 길었다면 대만국립고궁박물관에도 가고 예쓰진지 투어도 현지에서 예약해서 다녀왔을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주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아쉬움이지 후회는 아니다. 코로나 끝나면 또 혼자 떠나고 싶다. 그 때는 전형적인 대만 여행을 다녀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