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 9, 10월에 본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theme 1 여자의 우정
바그다드 카페
Bagdad Cafe/1987
바그다드 카페는 그곳이 위치한 사막처럼 황량하다. 카페에는 바그다드 카페 주인 브렌다와 가족들이 있다. 브렌다는 혼자 세 아이의 육아와 카페 경영을 한다. 육아와 경영은 그의 마음대로 되지 않고, 그나마 있는 남편이라고는 쥐뿔 도움도 안 된다. 브렌다는 이에 지칠 대로 지쳐 있다. 결국, 폭발한 브렌다는 무능한 남편을 쫒아낸다. 이런 상황에 야스민이 카페 바그다드를 찾았다. 야스민의 남편은 야스민을 사막에 홀로 남겨두고 떠났다. 야스민은 사막을 걷다가 발견한 바그다드 카페에 머물기로 한다. 브렌다는 외부인 그것도 외국에서 온 여인을 한껏 경계하고 적대시한다. 하지만 야스민이 브렌다의 가족을, 카페를 변화시키는 것을 보고 브렌다도 차차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야스민이 온 후로 카페는 더이상 메마르지 않다. 항상 사람들로 활기차며 북적북적하다.
사막 속의 도시 바그다드. 사막처럼 메마르던 브렌다의 삶에 야스민이 생기를 불어넣어서 영화의 제목이 바그다드 카페가 아닐까.
브렌다와 야스민은 남성을 떠나보내고 서로를 만났다. 이야기 속에서 남성과 헤어진 여성이 등장하면, 보통 남성을 못잊어서 힘들어하는 여성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가버린 남성을 그리워하거나 남성 때문에 힘들어하는 낌새조차 없다. 여성의 세계에는 로맨스만 있는 게 아니다. 남성이 없어도 여성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이런 냄새를 폴폴 풍겨주어서 좋았다.
극 중간중간에 브렌다 남편이 등장한다. 그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바그다드 카페를 지켜보고 있는데, 그 상황에 적절한 반응을 한다. 마치 고전소설의 편집자적 논평 같아서 보면서 조금 웃었다. 이 작품의 따뜻하게 바랜 색감도 좋다. 필름을 디지털로 복원하면서 이러한 색감이 나왔겠지만, 색감이 둘의 우정을 가시화한 것 같았다. 영화 메인 사운드 트랙인 calling you는 사막에 부는 바람 같다.
나를 차버린 스파이
The Spy Who Dumped Me/2018
스파이인 오드리의 구남친 때문에 오드리와 모건은 국제 범죄에 연루된다. 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오드리와 모건에게 생기는 헤프닝을 코믹하게 풀었다.
일각에서는 스파이가 소재인 코미디 영화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스토리와 설정들이다, 새로움이 없다고 평가했다. 맞는 말이다. 영화의 주연이 남성이었다면.
앞서 리뷰한 당갈처럼, 이 영화도 남성에게는 흔한 서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 중심 서사라면 말이 달라진다. 이 영화는 '미러링'을 통해 여성과 남성를 대하는 방식이 기존의 남성중심 콘텐츠와 정반대로 나타난다. 여성들이 사람답게 묘사된다.
1. 스파이 소재 영화에서 리드롤
대부분의 스파이 소재 영화에서 주인공은 남성 스파이다. '나를 차버린 스파이'에도 남성 스파이가 나오지만 주인공은 아니다. 리드롤은 모건과 오드리라는 두 여성이다. 모건과 오드리, 스파이 기관의 보스, 심지어 악당인 나디야까지. 현실처럼 개성이 뚜렷한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왜곡된 여성이 아닌, 여성 그대로, 사람답게 묘사된다.
2. 성적 대상화
영화 속에서 남성 스파이들은 '꽃'같은 존재다. 같은 식으로 소비되는 여성 캐릭터와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3. 우정
사실과는 다르지만, 미디어는 여자에게 우정은 사랑보다 못한 것이며, 여성의 우정은 남성의 우정보다 낮은 단계의 것이라고 표현할 때가 있다. 이 영화는 그렇게 묘사하지 않는다. 오드리와 모건에게 서로는 가장 소중하고, 믿을 수 있고, 지지하는 존재다. 반대로 남성 캐릭터들에게서는 이런 우정을 찾아볼 수 없다. 서로 견제를 하거나 싸운다.
남성 중심 스토리는 차고 넘치니까 흔한 스토리라고 치부되지만 여성 영화는 아직 그걸 평가할만큼의 양이 없다. 그래서 주연 배우의 성별이 여성으로만 바뀌었을 뿐인데 특별해졌다. 나는 이 영화가 더 이상 특별해지지 않는, 여성 서사 영화가 판치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theme 2 나의 기억
나만 없는 집
Home without Me/2017
맞벌이로 바쁜 엄마와 아빠, 사춘기로 집밖에 있는 시간이 많은 언니. 집에는 세영이 밖에 없다. 그럼에도 영화 제목이 '나만 없는 집'인 것은 가정 내 세영이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세영이는 외로워 보인다. 가족들은 저마다의 사정으로 세영이에게 무관심하다. 세영이의 말을 관심있게 들어주는 이가 없다. 어린 나이에 속상한 마음을 혼자 끌어안는 세영이가 안쓰러웠다. 결국 자기의 마음을 터트리듯이 엄마에게 말하지만 그 후에도 집은 변한 게 없다. 집에는 여전히 세영이 뿐이다. 드라마틱한 변화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런 무심함에, 서러움에, 외로움에 점차 무뎌지는 세영이가 그려져서 숨이 콱 막혀왔다.
누군가는 이것을 평범한 가족들의 이야기 혹은 가족의 일상적인 이야기라고 한다. 나 역시 세영이와 닮은 유년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평범'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게 보통 가족의 모습은 아니며, 보통 가족의 모습이 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데, '평범'하다는 말은 이걸 합리화를 시키는 것 같다. 난 그냥, 나의 어린 시절을 마주했다고 표현하고 싶다.
대사와 상황 하나하나가 내 기억을 끄집어 내서 만들어 낸 것 같았다. 어머니를 기다리며 티비를 봤고, 동생은 내 물건을 뒤적거리고 시치미를 뗐고, 친구들 앞에서 솔직하지 못했으며, 아무도 나에게 귀 기울여주지 않았던 나의 날들을. 내 모습을 재현하는 주연 배우의 연기와 그것을 왜곡없이 담아낸 카메라, 덕분에 불편함 없이 몰입할 수 있었다.
감독님의 차기작이 기대된다.
theme 3 독보적인
미스 슬로운
Miss Sloane/2016
슬로운은 뛰어난 실력을 가진 로비스트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런 모습때문에 신념과 거리가 멀어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유력(有力)한 의뢰인에게 총기 규제 완화 로비를 의뢰받지만 자신의 신념에 맞지 않는다며 거절한다. 이 일로 회사를 그만두고 총기 규제를 위한 로비 활동을 한다. 로비에서 밀리자 유력한 의뢰인과 회사는 슬로운의 도덕적 결함을 폭로하기로 한다. 판을 크게 벌리지만, 슬로운이 그것을 역이용하여 '지진'을 일으켜 상대를 '진멸'시킨다.
슬로운은 무서운 통찰력으로 로비의 흐름을 파악한 후 자신이 승리할 전략을 짠다. 결국 자신의 적대자인 남성 권력을 무너뜨리는 데는 성공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슬로운 자신도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무사하지는 않다. 그는 이런 결말을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도대체 왜 자기 파괴적인 전략을 선택했을까. 청문회 이후 편해보이는 슬로운을 보니까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전의 그는 잠 깨는 약을 먹어가며 자신의 평판을 쌓고 전략을 짰다. 전략이 슬로운을 망친 게 아니라, 슬로운의 삶은 이미 망가져 있었다. 어느 순간 이런 삶을 끝내고 싶었고, 잠 깨는 약을 버림으로써 완전히 결심한 것 같다.
무서운 통찰력을 가진 슬로운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 있다. 바로 포드의 진술이다. 포드가 나올 거라는 것은 예상해도 포드의 진술 내용은 예측하지 못했나보다. 진술을 듣는 슬로운은 진심으로 놀란다. 유일하게 그가 진짜 표정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슬로운의 bossy한 성격과 그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친 구구절절한 사연이 없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슬로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념이라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묘사하는데 '신념있는 로비스트는 자신의 승리하는 능력만을 믿지 않는다(A conviction lobbyist can't only believe in their ability to win.)'는 말이나 마지막 변호인에게 하는 말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반박해서 안 되는 건 없어요. 그게 비록 헌법이라 하더라도요.
번외
기억전달자
The Giver/2014
분란을 막기 위해 모든 것이 '커뮤니티'에 의해 통제되는 미래 사회가 배경이다. 이곳에서는 혈연 관계가 없으며 가정도 커뮤니티가 구성해준다. 직업도 커뮤니티가 지정해 준다. 식사, 의복, 이동 수단 등도 모두 커뮤니티가 지정한다.
다른 디스토피아 세계관처럼 선택받은 주인공이 부조리함을 깨닫고 사회 체계를 벗어나는 스토리이다. 원작 책을 보지 못했지만 아마 영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책으로 봤다면 어색하지 않았겠지만 영상으로 봤을 때 어색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체의 특성에 맞게 각색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연출도 장르와 어울리지 않았다. 판타지면 상상력을 자극하거나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것을 경험하게 해야하는데 그런 면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좋아하는 나로써는 각색이랑 연출에 더 신경을 썼으면...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포스터 찾다가 놀랐다. 출연진이 너무 의외여서. 메릴 스트립, 테일러 스위프트, 알렉산더 스카스가드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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